성 프란시스 수도회

5: 성서와 설교

 

 

 

성 프란시스

 

5. 성서와 설교

 

 

들어가며

 

프란시스의 회개와 기도하는 삶의 열매는 자신의 하느님 체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려는 깊은 갈망이었다. 그는 그들의 부족한 섦김으로 부터 주님에게 돌아오도록 모든 사람에게 설교와 호소 그리고 자신의 삶 을 통해 이것을 행하였다.

 

이 세미나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프란시스와 그의 성서에 대한 이해와 사용을 보며 두 번째는 설교가로서 프란시스를 본다.

 

프란시스와 성서

 

프란시스 시대의 상황을 누구나 성서를 소유하고 읽을 수 있는 우리의 현대 생활과 같이 상상하거나 돌아보기가 쉽다. 그러나 그 시대는 그렇지 않았다. 프란시스 시대의 대다수 사람들은 읽을 수도 쓸 수도 없었다. 그들에게 “성서”는 들어야 하고 주의 깊게 암기해야 하며 묵상해야 할 어떤 것이었다. 사람들은 일자 무식할 뿐만 아니라 필사된 성서를 갖기 위한 엄청난 비용은 부유한 사람들만이 성서를 가질 여유가 있었음을 의미했다. 당시의 성서는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성서전체 또는 신약성서 전체라기보다 성구집에 가까웠다. 물론 그 당시 성서는 교육 받은 자들 만이 이해할 수 있었던 라틴어로 되어 있었다. 프란시스는 초등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약간의 라틴어에 대한 기본적 이해만 갖고 있었다.

 

프란시스는 다양한 방식으로 성서를 사용했다. 성서는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그를 돕기 위한 하느님 말씀의 원천이었다. 성서는 기도와 찬양으로 함께 짜여지는 많은 구절들을 그에게 제공해주었다. 무엇보다도 거룩한 말씀은 살아있는 하느님과의 성사적 만남이었다.

 

프란시스가 성서들로부터 안내를 찾았던 시간들 가운데 하나가 교회를 수리하고 있었던 회심 초기였다.

 

그러나 어느 날 바로 그곳 성당에서 주님이 당신의 제자들을 복음 전파하도록 어떻게 파견하셨는지에 관한 복음이 봉독되었을 때, 거기에서 일을 거들던 하느님의 거룩한 이는 복음말씀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미사가 끝나자 사제에게 가서 그 복음에 대한 설명을 겸손하게 청하였다.

 

사제가 모든 것을 순서대로 이야기하기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금도 은도 소유해서는 안 되고, 길을 떠날 때 식량자루도 돈지갑도 빵도 지팡이도 가져가서는 안 되며, 신발도 두 벌의 옷도 가져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나라와 회개를 선포해야 한다고 하자, 이 말씀을 들은 거룩한 프란시스는 즉시 하느님의 영 안에서 기뻐 외쳤다 :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하던 바다. 그러더니 거룩한 사부님은 환희에 넘쳐 자신이 방금 들은 영혼에 유익한 말을 완수하기 위해 서둘러 댔다. (첼라노1, 22에서)

 

프란시스는 성서를 평이하고 단순하게 해석했다. 문학, 알레고리, 윤리, 신비라는 일련의 단계별로 성서를 이해하는 중세시대의 방법으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의 방법은 더욱 단순하고 직접적이었다. 성경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 그 본문을 취했으며 성령의 거룩한 안내를 통해서 해석했다. 그런 다음에 자신의 삶에 적용했다. 보나벤투라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성 프란시스는 성경을 공부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치지 않고 기도에 전념함과 덕을 끊임없이 실천한 것이 그의 영적인 안목을 정화시켰으며, 따라서 그의 예리한 지성은 영원한 광휘에 가득찼으며 성경의 깊은 뜻을 꿰뚫었다. 그의 뛰어난 재주는 꿰뚫었으며 애정에 가득찬 사랑으로 신학자들이 그들의 지식으로 들어갈 수 없는 영역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일단 성경에서 무언가 읽고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면 그는 그것을 기억에 새겨 놓았다. 그가 한번 조심스럽게 뜻을 파악한 것은 무엇이나 계속해서 묵상하였다. (대전기11,1a)

 

그렇지만 프란시스의 성경독서와 이해는 단순히 문학주의의 한 형식은 아니었다. 이것을 읽는 독자 또한 생명에 불려질 수 있도록 본문 구절은 생생하게 취해졌으며 의미는 하느님의 영감으로 비춰졌다. 이 지식은 소유될 수 없고 창작된 그것으로부터 하느님에게 되돌려 줘야 할 어떤 것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문자”는 하느님께 속하고 하느님을 통해서 생명을 준다.

 

알고 있는 문자나 알고 싶어하는 문자를 모두 자기 육신의 것으로 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선을 소유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주 하느님께 그것들을 말과 표양으로 돌려드리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문자의 정신으로부터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권고7.4)

 

또한 성서의 세 곳을 펼쳐 무작위적으로 구절들을 선택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방향을 찾기 위해 성서를 이용하는 프란시스를 발견한다. 프란시스의 친구들 중 한 명인 베르나르도가 그의 첫 동료로 프란시스의 삶에 동참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을 때에 그들은 “주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셨던 방법을 배우기 위해” 교회에 갔다.

 

그들은 기도를 드리려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으나,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이라서 세속을 포기하라는 복음서의 말씀을 찾을 줄을 몰랐다. 이리하여 그들은 주님께 자신들이 복음서를 첫 번째 펼칠 때에 당신의 뜻을 자신들에게 보여주시기를 정성되이 청했다.

 

복되신 프란시스가 기도를 마치고 나서, 닫혀진 책을 들고 제대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책을 펼쳤다. 첫 번째로 펼치자 주님의 뜻이 나타났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발견하자 복되신 프란시스는 대단히 기뻐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그는 복되신 삼위일체를 진실되게 공경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성서에서 세 번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성서를 두 번, 세 번 펼쳤다. 두 번째로 펼쳤을 때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왔다: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 세 번째로 펼쳤을 때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타났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세 동료들이 쓴 전기 28-29)

 

앞선 세미나에서 우리는 프란시스의 기도들과 다른 예전적 본문들을 고찰했으며 그것들이 얼마나 풍부한 성서적 인용과 언급들인지 주목했다. 그렇지만 예전적 본문들만 성서로 가득차 있는 것은 아니다. 프란시스의 다른 저작들에서 성경에 대한 깊은 묵상적 통찰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프란시스는 아마 이 모든 것들의 저자는 아닐 것이다. 예를 들면 프란시스는 자신이 쓰고있던 회칙들 안에 알맞은 성경의 인용문들을 삽입하기 위해 성경에 매우 정통했던 스페이어의 케사르 형제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특별히 예전적으로 사용된 성경의 부분들은 그것들에 대한 빈번한 묵상으로 프란시스에게는 친근한 것이었다.

 

세미나 초기에서 프란시스가 모든 것들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의 표지들을 봤던 방법을 보았다. 특별히 그에게 가치있었던 한 방법은 말이 적혀 있는 종이 조각이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이나 인간의 말이 쓰인 글을 발견하면 길에서나 집에서나 땅바닥에서나 대단히 공손한 태도로 그것을 집어서 ,거룩한 장소나 합당한 곳에 가져다 놓곤 하였다. 주님의 이름이나 성서 말씀과 관련된 글들이 그러한 곳에 적혀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첼라노1 82).

 

우리는 프란시스에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글들의 다른 네 곳에서 글이 적혀 있는 종이 조작을 줍거나 간수하도록 다른 이들에 대한 교육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신이 되신 말씀과 성서에 이야기된 거룩한 말씀은 서로 하나이며 쓰여진 말은 거룩한 진리를 가리키는 표지이었다.

 

프란시스의 성경 사용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려고 하는 그의 갈망이다. 형제들을 위해 쓰신 규칙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작은 형제들의 회칙과 생활은 순종 안에, 소유없이, 정결 안에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는 것입니다(제2회칙1.1). 그가 썼던 1221년 회칙은 이것을 더욱 생생하게 표현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제1회칙 1.1). 복음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이다. 복음은 복종해야 할 규칙 묶음이 아니며 “복음에 복종하는 것”은 복음들로부터 발췌한 어떤 권고나 규칙들로 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살아있는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이며 모든 것이 그 만남의 빛 안에서 보여지는 생명의 길을 청하는 것이다. 그것 이상으로 이것은 “방식”이며 다른 말로 하면 “길” 또는 “지름길"이다. 우리는 한 곳에 서 있거나 그것들을 바라보기만 해서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를 수가 없다. 예수가 걸었던 같은 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 이것은 고통과 죽음의 길이지만 부활의 길이기도 하다.

 

토론과 질문

 

  • 여러분은 성경을 어떻게 읽고 /들으며 /묵상하는가?
  • 프란시스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킴”에 바쳐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킴”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인가?

 

설교가 프란시스

 

형제회 초기부터 프란시스와 형제들은 자신의 청중들을 회개하도록 열광시키는 단순한 설교들을 했다. 사도적 선교는 복음을 따름의 자연스런 결과였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단순하게 살았고 복음을 설교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것 같이 그들 또한 그렇게 단순하게 살며 설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러나 후에 프란시스는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는 하느님을 더욱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삶이 순회설교의 생활인지 아니면 세상에서 물러나 기도에 전념하는 삶인지 식별할 수 없었다. 보나벤투라는 그의 형제들을 향한 프란시스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형제들이여, 당신들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어느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거요? 즉, 내가 나의 모든 시간을 기도하는 데 전념해야겠소? 아니면 돌아다니며 설교를 해야겠소? 나는 보잘 것 없고 가치없는 수도자요. 나는 교육도 못 받았고 설교하는 것도 능숙하지 못하오. 그리고 나는 설교하는 재능보다 기도하는 재능을 선물로 받았소. 뿐만 아니라 설교는 하늘로부터 받은 선물을 나눠 받는 것에 불과하지만, 기도는 공로와 많은 특별한 은총을 얻게 하는 것이오. 기도는 덕을 늘어나게 하는 한편, 마음의 욕망을 정결하게 하는 데 도와주고 인간을 유일하시며, 진실하시고, 최고이신 선하신 분과 일치시켜 주는 것이오, 설교를 한다는 것은 영혼에 먼지가 들어가게 하고, 수도자의 수양에 많은 주의산만과 해이함을 가져다주는 것이오. 기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얘기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리고 천사들을 우리의 동료로 삼아 천사들과 맞먹는 가치있는 생활을 하오. 그 반면 설교할 때 우리는 인간의 지위로까지 내려와서 인간에 관해서 생각하고, 보고, 듣고, 말하면서, 그들 중 한 사람으로서 그들 가운데서 생활하게 되는 것이오. 그러나 한편 하느님의 눈에 다른 무엇보다 더 중요시 여겨지는 한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것이오. 즉 지혜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외아들은 영혼을 구하기 위해 성부의 품을 떠나 내려오셨다는 사실이오. 그분은 당신 자신의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세상을 가르치시기를 원하셨으며, 당신의 피로써 그들을 깨끗이 씻겨주시고 또 당신의 귀한 피를 맛보게 하심으로 그들을 떠받쳐 주시고자, 당신의 귀한 피의 대가로 구원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가져다주시길 원하셨소. 그분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겨두시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모든 것을 너그럽게 내놓으셨소. 우리는 그분이 산 위에서 보여주시는 것처럼 우리 앞에서 세우신 모범을 따라 항상 행동해야 하는 것이오. 그래서 내가 묵상의 고요함을 포기하고 나가서 일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과 더욱 일치되는 것같이 여겨지는 것이오(대전기 12장 1).

 

프란시스는 또한 다른 이들이 자신의 들음으로써 하느님께 더욱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설교를 통해 하느님 체험을 그들과 나누는 것이 더 좋다는 조언을 개별적으로 주었던 실베스테르 형제와 글라라 자매와 상의했다.

 

그렇지만 설교를 한다는 것은 말을 하는 것 이상이다. 행동들은 말보다 더 크게 말한다 그래서 프란시스와 그의 형제들은 또한 자신들의 삶과 행동들을 통해서 단순하게 설교했다. 가일 형제가 “하느님의 말씀은 설교하거나 듣는 사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사람 안에 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프란시스 시대의 설교의 한 형식은 사람들을 회개로 부르는 간단한 이야기였다. 이것은 프란시스와 그의 첫 형제들이 했던 설교 형식이었다. 또한 더욱 신학적이었던 설교 형식이었다. 이것은 교육 받은 이들의 신앙을 확실케 하고 그 당시 유행하였던 다양한 이단들과 대결하는 것을 도와주는 데 목표를 두었다. 충분한 교육과 교회 당국의 승인이 있는 이들 만이 이런 양식으로 설교할 수 있었다.

 

프란시스 자신의 설교는 평화와 참회 아니면 회개라는 두 개의 중심 주제에 관계되었다. 이웃과 평화롭지 못한 이들은 하느님과 평화롭게 살 수 없으므로 평화가 필요하다. 하느님을 향한 끊임없는 돌아섬으로써만 사람들에게 복음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므로 회개가 정말 필요하다.

 

프란시스의 설교의 특징은 찬미과 감사이다.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그의 긍정적 증거는 다른 이들을 하느님에게 이끌었다. 그의 언어는 대학들에서 교육 받은 이들의 우아함이 부족하였으며 설교하는 동안 그의 행동(옷이 벗겨질 정도의 춤과 노래)은 예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사람들이 감화되고 움직였다는 것이며 이 방식으로 많은 이들의 신앙과 교회의 삶들이 쇄신되었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그와 함께 일하였으며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그가 전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마르16,20)해 주시는 가운데 프란시스가 설교하면서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닐 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가 하느님에 의해 세상에 보내진 이 새로운 설교자를 보고 들으려고 때지어 모여들었다. 진리의 사신인 프란시스는 하느님 이름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였다. 영향력있는 설교자로서 그는 딱딱하게 되어버렸던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회개하게 하고-이것이 더욱 큰 것이다-그리고 육체와 영혼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었다(대전기 12장 8).

 

토론과 질문

 

  • 여러분은 “복음 설교”를 어떻게 하는가? 행동을 통해서? 말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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